카이스트번역

(2006-06-21 07:03:23, Hit : 4098, Vote : 608)

교정과 교열

교정과 교열은 글을 쓰면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글을 쓰는 사람도 교정과 교열을 보는 것이다. 한자숙어로 퇴고에 해당하는 것이다.

필자의 손을 떠난 원고는 채자나 출판을 위한 코드 변화을 거쳐 교정쇄나 프린트물이 나오게 되는데, 이때 교정과 교열만을 맡은 사람의 손을 거치게 된다.

교열은 글의 마무리이면서 자잘한 것을 마무르는 업이다. 문화라는 것도 비슷하다. 선진문화를 이룬 나라들에서는 작은 것 하나도 무시하지 않는다. 작은 것을 무시하게 되면 전체의 조화가 깨질 뿐더러 조그마한 흠으로 인해 다른 부분에 뒤틀림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출판이라는 것은 문화의 발전과 전승을 가능케 하는 바탕인 데다 문명을 잇는 매개이니 만큼 소홀히 할 수 없는 면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선진국으로 치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어느 나라도 교열을 홀대하지 않는다.

미국/영국
영어로 씌인 책이나 신문에서는 오자나 탈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근본적으로 글을 다듬고 오자나 탈자를 찾아 고치는 일을 빠뜨릴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일로 여기는 마음가짐에서 말미암은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컴퓨터 자동교열 덕분이다.

글을 다듬고 오․탈자를 바로잡는 교열과 교정은 쓰는 것 못지 않게 꽤나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소홀히 할 수도 없다. 필요한 손과 시간이 아까워 생략하게 되면 ‘간음 성서’와 같이 출판에 치명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까닭이다.

요즘 영어권 사람들은 개인용 컴퓨터로 글을 쓰고 컴퓨터로 책이나 신문 따위를 만든다. 글을 쓰는 데서부터 읽을 거리로 나오기까지 컴퓨터가 없어서는 안되게 되었다. 글을 입력하거나 글을 쓰고 나서 마무리하는 교열 작업을 하면서 자동교열 프로그램을 가동하면 오자나 탈자가 나는 일이 거의 없다.

따분하고 시간만 잡아먹는(?) 교열과 교정을 안 보니 얼마나 편할까. 컴퓨터를 발명한 미국인들이 먼저 자동교열 프로그램을 개발해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영어에 비해 한글은 과학적이긴 하지만 자동교열프로그램을 만들기에 너무 복잡하다. 자동교열을 위해서는 자료를 입력해야 하는데, 한글은 어미변화가 엄청나게 많고 낱말이 들어 가는 곳이 일정하지 않아 충분한 자료를 모으기 자체가 엄두도 내기 어려운 일이다.

필자는 지금 나와 있는 한글프로그램이 귀찮게 삐삐거리기만 한다고 불평하는 사람이다. 누구나 다 아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면서도 정작 모르고 지나친 것은 저도 그대로 넘어간다. 어찌 보면 앵무새나 다름없다. 빈약한 자료 축적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만, 자동교열이란 그럴듯한 이름에 홀려 기대감을 갖고 대한 것을 생각하면 배신감이 들기도 한다.

영어를 쓰고 있는 나라에서 교열과 교정의 절대적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간음 성서’는 Wicked Bible이라고 하는, 1631년에 영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가리킨다. Adulterous Bible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왕이었던 스튜어트왕조의 찰스1세 명으로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Authorized Version)하면서 《출애굽기》 20장 14절의 모세 십계명 가운데 제7계명을 ‘간음하라’라고 인쇄한 것을 비아냥조로 부른 이름이다. 당시 성경이 갖는 권위를 헤아려 보면 엄청난 파문이 일어났을 것은 불을 보듯 훤하다.

Thou shalt not commit adultery.

위의 제7계명 가운데 ‘not’이라는 부정어 하나가 빠짐으로써 제7계명은 ‘간음하라’ 돼 버린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not’이 빠진 것을 아는 이가 성경의 나머지 글자는 모두 잘 됐다 하더라도 ‘간음성서’라 욕하고 손가락질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not’이 빠진 것을 모르는 사람은 성경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통신과 교통이 발달한 지금도 팔린 책을 모두 회수하기는 불가능한데 그 당시 책을 다 수거하지는 못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때의 엄청난 파문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글자 하나 하나를 바로 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를 수 없었을 것이다.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간음성서’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정을 인식의 밑바닥에 깔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정과 교열의 작업을 절대 홀대함 없이, 높이 평가한다.

프랑스
파리에서 발행되는 르 몽드 신문의 교열 현황을 보면 우리로서는 부럽기 그지없다. 겨우 32면을 발행하는데 교열기자가 38명이나 된다. 우리가 예전에 했던 것처럼 교정쇄로 준보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앞서 컴퓨터 교열과 교정을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48면을 발행하는 신문이 30명도 안되는 것과 견줘보면 한자라도 틀리지 않고 바른 기사를 쓰려 하는 르 몽드 신문의 정성에 탄복하지 않을 수 있다.

프랑스 국민이 자기네 말을 유독 사랑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대표적인 게 프랑스말 사용에 관한 법을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는 일이다.

프랑스의 국어(프랑스말)에 관한 법은 1975년 12월 31일에 제정된 것을 대폭 바꿔 강화하여 1994년 7월 29일 1차로 개정했다. 프랑스를 제외하면 법을 만들어 자기네말을 강제로 쓰도록 하는 나라는 세계에 없는 것 간다.

영어와 독일어가 역수입되는 것은, 일등 문화국임을 자임하는 그들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 있다. 또 자기네 말을 세계 최고의 말로 자부하는 터에, 경제력에서 뒤진다고 말까지 눌린다는 것은 모욕으로 생각할 법하다.

프랑스말 사용에 관한 법은 총 24조인데, 제1조에는 프랑스말을 프랑스의 유산으로 규정하여 헌법에 넣었다.

2, 3, 4조에서는 사용에 대한 국민의 의무화규정과 관련법을 이행하지 않을 때의 처벌 규정을 확고하고 엄하게 설정해 놓았다.

5, 6, 7조에서는 공인된 형태의 모든 글에는 그 표현을 프랑스말로 사용하도록 했고, 학술회의나 각종 국제학회 참석자들의 경우 프랑스말 사용을 의무화했으며, 외국의 자료나 외국 참석자들이 사용하는 외래어에는 프랑스말로 설명서를 붙이도록 의무화했다.

8, 9, 10조에는 각 기업의 근로자들에게는 노동법 조항에 프랑스말 사용의 의무 규정을 넣었다.

11, 12, 13조에서는 상품의 유통업과 특히 방송업계의 프랑스말 사용을 의무화헸고, 또 홍보물 제작에도 똑같이 적용하도록 했다.

14, 15조에서는 제조업체와 기타 법인체의 마크와 상표에도 외래어 사용을 규제했고, 위반했을 경우에는 보조금 지급의 중단은 물론 지급된 보조금까지 회수하도록 되어 있다.

16, 17, 18, 19, 20조에서는 경찰이나 검찰 등의 사법기관에는 프랑스말 사용에 대한 법의 조사권과 단속권이 부여됨을 규정했고, 임무수행에 따른 규정과 처벌조항이 마련돼 있다.

그리고 이 법 조항에는 법적 효력과 형벌절차가 있고, 특히 20조에는 이 법이 통과된 날로부터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고 무기한 소급하여 적용하도록 규정돼 있다.

21, 22, 23, 24조에는 지방의 언어(사투리)에는 이 법이 적용되지 않으며 매년 9월 15일 전까지 관련부처의 실무자와 사법기관에서는 국회에 나와 의무적으로 보고하도록 되어 있고, 이법의 효력이 발효되는 시기를 규정헸다. 특히 마지막 24조는 이 법은 국법으로 실행한다는 내용이다.

우리가 늘 대하는 광고, 상호, 간판, 상품이름 따위를 보면 우리말 맞춤법에 어긋나는 것이 대부분이다시피 하고 외래어 맞춤법은 굴레로 생각이나 하는지 외래어표기법에 맞는 것이 드물 정도다.

프랑스를 따르자고 하기에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말을 지킴으로 해서 그들의 정신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백번 받아들여야 한다. 말이 멍들면 우리의 마음가짐도 얼먹고 행동거지도 우리다운 것에서 벗어나게 마련이다.

일본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은 메이지 32년 5월 24일자 사설 속에 ‘無智無能한 露國皇帝’라는 형용구를 활자화해 신문 배포까지 마쳤다. ‘全智全能’(한국 표기는 全知全能)의 오기(誤記)로,추어올린다고 쓴 것이 조소하는 글이 돼 버렸다. 임직원과 기자들은 외무성-내무성-경시청-재판소-검사국 그리고 러시아 대사관 등을 두루 돌며 사과하느라 진땀을 빼고 호외를 발행해 바로잡는 전무후무한 조치를 취했다.

물론 사안이 사안인지라 그러했겠지만, 하나하나의 낱말이 갖고 있는 ‘힘’을 알지 못한다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일본은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출판․인쇄가 발전하면서 교정․교열을 중시 여겨 왔으며, 아직도 그 정신은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