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우병 댓글 참살이(웰빙) 누리꾼(네티즌) 홈페이지 블로그 파파라치 미시족 사이버 외계어 얼짱…. 이미 보편화된 이런 신조어는 언제쯤 국립국어원 발행 표준국어대사전에 오를 수 있을까. 인터넷 사전과 전자사전에 밀려 종이 국어사전 개정작업이 사실상 중단된 현재로선 기약이 없다.
종이사전 출판사들은 인터넷 보급 이후 사전 매출이 급감하자 개정판 발행 계획을 전면 유보했고,인터넷 사전과 전자사전 업체들은 기존 종이사전 수록 어휘를 그대로 가져다 제공할 뿐이다. 전문가들은 실생활 어휘와 사전 어휘간 괴리가 계속 커지면 장기적으로 국어의 퇴조가 불가피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종이사전 현황=30만단어 이상 수록돼 학술적 가치를 갖는 국어대사전은 1960년대 이후 민중서림 금성 어문각 삼성 등 민간 출판사 4곳과 정부기관인 국립국어원이 각각 발행해 모두 5종류가 시판됐다.
본보 취재팀이 확인한 결과 삼성은 1987년,어문각은 1992년,금성은 1996년 마지막 개정판을 낸 뒤 절판했다. 민중서림은 1994년 개정판 이후 후속 개정 계획을 무기한 보류했다. 1999년 48만단어의 표준국어대사전 초판을 발행한 국립국어원은 2008년 개정판을 내려 했지만 막대한 예산을 확보할 수 없어 일부 오류만 수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에따라 시중의 국어대사전은 모두 7∼29년 전 어휘들로 채워져 있다.
20만단어의 국어중사전과 10만단어 국어소사전은 2∼4년 전까지 개정판이 나왔지만 국어대사전을 토대로 제작된데다 어휘 수가 제한돼 있어 최신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인터넷·전자사전과 정부기관 실태=오프라인 국어사전을 시장에서 밀어내고 있는 인터넷사전은 네이버 다음 엠파스 등 포털 사이트마다 제공하고 있지만 자체적으로 어휘를 업데이트하는 곳은 전무하다. 오프라인 출판사와 계약해 국어사전 DB를 그대로 가져다 게재할 뿐이다.
다음 관계자는 “사전 콘텐츠를 직접 제작하려면 엄청난 시간 비용 인력이 소요돼 오프라인 콘텐츠를 사용하는 게 훨씬 경제적”이라고 말했다. 카시오 샤프 에이원프로 등 3대 전자사전 업체도 오프라인 DB를 사다 쓰고 있다.
국립국어원이 정부 예산을 지원받아 국어사전 DB를 운영하고 있으나 담당 인력은 단 2명뿐이고,표준국어대사전 보완 업무는 1명이 전담하고 있다. 국어원 관계자는 “매년 등장하는 신조어를 수집하곤 있지만 국어사전 관련 예산이 2억9000만원뿐이고 인력도 절대 부족해 체계적인 개정작업은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문제점=1990년대 후반부터 수차례 국내 축산업을 초토화시켰던 ‘광우병’이란 말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물론 이 사전 인터넷판에서조차 찾을 수 없다. 세계 1위 인터넷 강국이라지만 ‘홈페이지’란 용어조차 국내 최고 권위를 가진 이 사전에 나와 있지 않다. 영국 옥스포드 영어사전이 2003년 개정판에 올린 주름살 치료제 ‘보톡스’ 역시 국내에서 열풍이 불었지만 어떤 국어사전에도 없다.
학자들은 실생활 어휘와 사전 어휘의 괴리가 국어의 이원화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또 지식의 집약체이자 전달 도구인 사전이 퇴조하면 국어 어휘 및 문법 연구에 장애가 되고 장기적으로 국어의 퇴보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서울대 홍재성(언어학) 교수는 “국어사전의 제자리 걸음이 당장은 별 문제 없어 보여도 점점 한국인의 어휘 사용 폭을 좁게 만들고 지식 축적을 방해해 결국 문화 수준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원인·대책=가장 많은 종류의 사전을 발행해온 민중서림의 1980년대 연간 사전 판매량은 약 30만권. 그러나 1998년부터 인터넷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지난해 판매량은 3분의 1 수준인 10만권선까지 떨어졌다. 사전 판매량이 50% 이상 판매량이 감소한 출판사도 많다. 인터넷에 밀려 종이사전 수지가 맞지 않자 국어 어휘 연구의 첨병 역할을 해온 출판사 사전팀은 속속 와해됐다.
서울대 이기문(국어학) 명예교수는 “국어사전은 교사도 보지 않고 학생은 외국어 사전만 끼고 다니며,참고서와 단어장에만 의존하는 학습 방식이 퍼져 있다”며 교육현장의 국어 경시 풍조에서 원인을 찾았다.
국립국어원이 신조어 수집과 어휘 연구를 한다지만 국어사전 담당자가 2명뿐인 인력구조를 방치하고 있는 정부의 무관심도 큰 몫을 차지한다. 연세대 이상섭(사전학) 명예교수는 “정부가 국립국어원 지원을 강화하는 동시에 민간 출판사나 학회에도 사전 발간을 위탁해 국어 연구 경쟁체제를 갖춰야 한다”며 “내용만 충실히 개정된다면 하드웨어가 종이든 인터넷이든 상관없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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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은 어떻게 하나>
영국 옥스포드 영어사전 인터넷판은 지난달 9일 ‘Chinglish(중국식 영어)’ ‘self-tanner(살을 태운 듯 보이게 하는 화장품)’ ‘B·B·Q(바베큐의 준말)’ 등 500여개 단어를 새로 등재했다. 지난해 12월에는 ‘thugged out(터프한 모습)’ ‘hoochie(매우 성적인 여자)’ 등 힙합 가수들이 즐겨 쓰는 비속어 2000여개를 뜻풀이와 함께 게재했다.
2003년 10월에는 옥스포드 영어소사전 개정판에 ‘sex up(더 맥력적이고 영향력 있게 만들기 위해 부풀리다)’이란 최신 단어가 실렸다. 이 단어는 1990년대 ‘성적으로 흥분시키다’는 뜻으로 쓰이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2003년 영국 정부가 이라크 무기 첩보를 부풀렸다는 의혹이 제기됐을 때 ‘부풀리다’는 의미로 변용되자 즉각 사전에 오른 것이다.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옥스포드 영어사전은 인터넷판을 발행,해마다 최소 4차례 인터넷 개정판을 내며 1500단어 이상을 추가한다. 이는 고스란히 영어 어휘 데이터베이스로 축적돼 옥스포드 출판부가 발행하는 수십 종류의 오프라인 사전 개정판에 반영된다.
영국의 상황은 인터넷 확산으로 대형 포털사이트가 국어사전을 무료로 제공하기 때문에 온오프라인 모두 어휘 연구 작업이 사실상 중단된 국내 상황과는 대조적이다.
옥스포드 영어대사전은 약 40년 동안 학자 1000여명이 동원돼 1928년 처음 완간됐다. 2001년엔 인터넷과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사용되는 축약 문구까지 영어로 인정돼 옥스포드 사전에 올랐다. ‘BBLR(be back later·곧 올게)’ ‘HAND(have a nice day·좋은 하루)’ 등 축약 메시지와 즐거움을 뜻하는 ‘:)’,슬픔이란 의미의 ‘:(’ 등 감정 표현 부호까지 부록에 담은 사전 편찬팀은 “현대 영어에 큰 영향을 미치는 문자메시지도 이젠 영어의 일부로 인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문화적 자부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프랑스 정부는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사전 편찬에 투입하고 있다. 17세기 왕립 학술원을 창립해 국가 차원에서 사전을 만들기 시작한 뒤 1690년대 첫 사전을 발행했고,총리 직속기구인 불어연구원은 1960년대 표준불어대사전 작업에 착수,1990년대 16권을 완간했다.
프랑스 민간 출판사 라루스는 1910년 첫 불어사전을 펴낸 뒤 거의 매년 개정판을 내 곧 100번째 개정판이 출간된다. 1950년대 처음 사전을 낸 로베르출판사는 주요 단어의 경우 수십쪽을 할애해 뜻과 용례를 서술할 만큼 학술적 가치가 높은 사전을 매년 개정하기로 유명하다.
40년 이상 민중서림 편집실을 지켜온 윤차현(68) 상무는 30일 “출판계에 남아 있는 사전 전문인력이 다 합쳐도 50여명뿐인데다 그 중 국어사전 전문가는 대부분 나처럼 60∼70대 노인”이라며 “이대로라면 10년 안에 사전 편찬 전문가가 사라지는 국어 위기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하고 1963년 민중서림 전신인 민중서관에 입사한 그는 학습 참고서를 편집하다 1979부터 사전 편집을 시작했다. 25년간 그가 편집한 국어 영어 일어 사전 등은 줄잡아 200권이나 된다. 민중서림이 펴낸 국어사전은 대부분 그가 편집을 총괄했다.
서울 공덕동 민중서림 편집실에서 만난 윤 상무는 국어사전 편찬 작업의 어려움으로 인터넷 사전에 밀려 수지가 맞지 않는 점과 함께 인력난을 꼽았다. 5년 전 정규직 사원을 선발한 민중서림은 신규인력을 충원할 여력이 없을 뿐 아니라 지원자도 적어 채용을 중단한 상태다. 1980년대엔 민중서림 직원 40여명 중 10명이 국어사전팀 고정 인력이었지만 지금은 5명도 안된다.
윤 상무는 “현재 편집실 직원 20여명 가운데 60∼70대 노인이 나를 포함해 10명 이상이라 쉬고 싶어도 대신할 사람이 없다”며 “출판사 사전팀과 국어학자 수십명이 투입돼 50차례 이상 교정을 거쳐야 하는 국어대사전 작업은 현재 인력구조에선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또 “국어사전 제작의 기초인 자료 축적이 사실상 중단된 상태여서 막상 개정판 발행 계획이 수립된다 해도 작업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예를 들어 새로 발견된 식물이나 동물의 국어 명칭을 실어야 하는데 관련 연구가 방치된 게 한두 건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인터넷 사전에 대한 불만도 토로했다. 윤 상무는 “학생과 성인 대부분이 국어사전 검색을 인터넷으로 하는데 인터넷 사전은 종이사전 콘텐츠를 대폭 축약해 제공하기 때문에 예문과 어원 설명이 크게 부족하다”며 “이런 식의 사전은 지식 전달과 획득에 도움이 안된다”고 말했다.
